아내안에하나님이없다
필립얀시
의심에서 믿음으로 떠나는 순례. 나는 때로 하나님께서 계신지 조차 확인할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수 있들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의심"에서 출발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 가운데 기록되었다. 즉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순례의 과정을 요약한 글이다. 루이스는 말하길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일은 가르침을 받는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하는것" 이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들을 다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이 질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를 여전히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이책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우리 삶에 힘을 발휘하는지 혼자 힘으로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1 부. 목마름 : 하나님을 향한 열망
1. 어중간한 틈새: 하나님이 계신다는걸 믿고는 있는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가지고 있지못한 영적상태. 완전히 born-again 하지 못한 상태.
교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안에 살아계십니다." 또는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정복자입니다" 비록 이런 말들이 무언가를 열망하게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말을 일상적인 경험속에 적용하지 못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을 괴롭히는 문제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것과 교회에 대한 끈질긴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 은 참회록(Confession)에서 말하길 " 나는 알수 업ㅁㅅ는 여러가지 일들이 확실하게 들어나길 원한다. 마치 7 더하기 3은 10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런 일들을 깨닫고 싶다". 하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확실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2. 샘물 곁에서 느낀 갈증: 하나님은 계신것 같은데 만날스 없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신건 알지만 실제로 느낄수 없는 그런 타는 갈증.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아마도 당신이 찾던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토마스 머튼-
과학지신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차이점:과학지식은 프톨레미로 부터 시작해 갈릴레오, 코페루니쿠스, 뉴톤, 아인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축적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만남은 독특하고 개별적이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은밀한 만남과 같다. 따라서 5세기의 신비주의자나 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20세기 신학자보다 더 깉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알고 사랑하도록 창조 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자신을 명확히 들어내시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면 그분은 왜 자신을 좀더 명백히 드러내시지 않는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프래드릭 뷔크너는 하나님과의 거적과 분명한 징조를 간구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그런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It is as impossible for man to demonstrate the existence of God as it would be for even Sherlock Holmes to demonstrate the existence of Arthur Conan Doyle.
Compassion is sometimes the fatal capacity for feeling what it is like to live inside somebody else's skin. It is the knowledge that there can never really be any peace and joy for me until there is peach an joy for you too. -Frederick Buechner-
2 부. 믿음 :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3. 의심을 위한 공간: 우리는 한 시간동안에도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수십번도 더 오락가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행동은 항상 민첩하게 유지한다. -에밀리 디킨스(Emily Dickinson)-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관계를 세워가는 선행조건이 된다. 하지만 어떤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앙을 버렸고 어떤때는 상처를 받거나 환멸감에 짜져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교회안에 남아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것 보다 더 어려운것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바보들을 톤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밖에 모르는 단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처럼 믿음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자라나고 당연히 왕성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는 약화된다. 역전의 법칙, 먼저된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된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 있는 뼈대와 같다. 의심은 감추거나 두려워 해야할 무언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직을 가지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단단한 골격이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한다. 완전한 확실함 속에 거하고 있는 사람이 믿음의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의심이 전혀 없는 완전한 확실성보다는 개연성위에 뿌리를 내려라.
뷔크너는 비가시적인 하나님과 가시적인 인간사이의 관계는 항상 의심이라는 요소가 내포될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심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파멸할수밖에 없지 않는가? 의심을 위한 공간이 없다면 나를 위한 공간도 없을것이다."
나는 점점 확실성보다는 신비로움 속에서 진정한 평안함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우리는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살아계시다는 최종적인 증거를 결코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는 파스칼처럼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게 깨닫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교회는 언젠가 완성될 믿음을 위한 안전하고 든든한 장소를 제공해샤한다. 우리는 완전한 형태의 믿음을 교회 문 앞에 제시해놓고 마치 그것이 입장권이라도 외는 것처럼 강제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어쩌면 두려움이 아닐까?
4. 연단받는 믿음: "나는 어려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고백하지 않았다. 나의 믿음은 의심의 용광로를 통해 태어났다." -피오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왜 당신은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나요? 인간들의 행동은 타락한 세상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남용한 극단적인 사례들이다. 우리는 자신이 지극히 연약하고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순간 젼혀 책임이 없는 누군가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바로 하나님에게....
성경은 왜? 라는 질문처럼 원인을 묻는 과거 지향적인 물음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앞날에 대한 소망을 굳게 유지하고 있다. 고통이 변하여 선한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고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위해 과거를 돌아보며 얽매이기보다는 구원의 결과를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시각을 항상 유지하셨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싶다면 삶의 여정을 중단하십시요. 당신은 결코 그 해답을 알지못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알수없는 것들, 대답할수 없는 질문과 도무지 이해하지못할 일들을 거쳐가는 여정이기때문입니다. -Jeanne Guyon-
5. 양면성을 지닌 믿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면과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몇몇 지식인들은 전지전능의 하나님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많은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더 좋아한다. 인격적인 하나님만이 그것들을 베풀어줏수 있다.
악한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선한일에 대해서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내가 그렇게 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태도를 갖는것이다. 그런 신뢰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배우고 터득한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나는 의심이 생길때마다 하나님께 자신을 여과없이 계시하신 예수님께 집중했다. 나는 하니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과 일치점을 찾을 수 없는 비극이나 악행이 일어날때에도 먼저 그분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믿음의 양면성이란 결국 어려운순간에도 또는 행복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이든 간에 믿음에 대한 질문이 어떻든 간에 믿음의 무한한 의미는 유한한 인간의 실존을 확인 시켜줄 따름이다. 그 의미는 고통이나 부패나 죽음 따위로 변질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레오 톨스토이-
6. 믿음안에 살기: 과거와 미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것음 바늘에 실을 꿰는 일과 같다.
믿음의 삶은 인내와 소망으로 이루어지고 과거와 미래로 이루어진다. 믿음안에 산다는것은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에 주실 약속을 생각하며 현재를 하나님을 위해사는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부활신앙): 미래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보류하게 함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미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땅위의 고통과 혼돈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것으로 논리적인 가정을 세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으므로 나는 신음하는 이땅위에 일어나는 명백한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정의를 확실히 신뢰할수 있다.
톨스토이 "세가지 질문" 기억하라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유일한 순간이 있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은 이 순간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을 가지고 있는 때이므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보여주신 신실하심에 대한 기록은 더 나은 미래의 희망과 결합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가도록 준비시킨다. 우리는 지금 이외의 다른 시간들을 통제할수 없다. 과거는 변할수 없고 미래는 예견할수 없다. 내 앞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뒤를 따라 살아갈 따름이다.
변화란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은혜의 작용이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하며 끊임없이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7. 평범함에 정통하라: 믿음의 습관
위대한 승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하세 수행할때 성취된다. 내가 할수있는 일은 그저 현실에 충실하는것 뿐이다. 과거의 실패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미래의 불확실이 나를 방해하시 못하게 하라. 우리가 통제할수 있는것은 현재의 행동뿐이다.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불확실성과 긴장과 혼돈을 제거하길 원하다면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나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할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Andrew Greeley-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단 의심을 극복하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할뿐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기독교는 언제난 신뢰와 순종이 우선해야한다. 그 다음에 지식이 따라온다. - Sheldon Vanauken의 엄격한자비 (A Severe Merch)-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전에 먼저 그분의 뜻을 행하라.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활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토머스 머튼은 말하길 "당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당신을 알아갈수 있게습니까?" 그 분을 본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보인다.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그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자들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믿음은 완전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순종을 요구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애매모호한 말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리라
하나님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성취된것은 아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
섬기는 자가 가장 높은자다.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8. 하나님을 아는것
하나님이 존해한다는 말은 우리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말도 마찬가지다. 영혼은 육체에 결합되어 있다. 또는 인간에게 영혼은 없다. 세상이 창조되었다 또는 창조되지않았다 라는 말들은 이해할수 없는것들이다. -파스칼-
우리가 하는 많은 행동은 믿음에 기반을 둔것이지 지식에 기반을 둔것이 아니다. 모든인간관계는 불확실성이라는 기반위에 놓여있다. 불확실성이란 다름이라는 신비한 특성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항상 서로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관계를 이어간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만찬가지다.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실존을 알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단 그들의 행동이나 그들이 우리속에 불러 일으킨 느낌만이 그들을 알게 하는 유일한 창구다. 나는 외부에 나라는 특별한 어떤 존재가 있다는것을 알려주는 어떤행동 생각의 변화와 조합등을 감지한다. 나 역시 그들에게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인식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결국 믿음의 행동이지 이성의 행동은 아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다 이해할수 없고 알수도 없다. 단지 많은 증거를 통해 그 믿음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얻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정반대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비슷하기를 원한다. 만질수 있고 형체를 가지고 있으며 인식할수 있기를 원하다. 역사상의 많은 우상숭배가 이런 인간의 본능르 잘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르다. 하나니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닮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같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묵상할 기회를 상실한 천사, 천사들은 하나님을 묵상할 이유가 없다. 천사들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못하다.
토마스 그린, 성공적인 기도 생활과 성공적인 결혼생활이 비례한다. 관계의 확실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확실함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부모의 입장에서 또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심분에서 베풀어야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다. 결혼서약과 하나님과의 언약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 약속 모두 충실함을 요구한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의미에서 믿음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어머니로, 주인으로 또는 심판자로 그리고 사랑 많은 분으로, 분노하고 질투하는 분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오르 묘사한 성경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이런문제는 도저히 다룰수없어". 그런 말은 그들이 느끼는 심각한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다룰수있는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찾게 될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 자신처럼 마음대로 조작할수 있을것이다. 또한 그분의 자비하심의 범위도 우리 마음대로 축소시킬수 있을것이다. -Kathleen Norris-
기도하는데로 응답이 되지 않는 이유? 우리가 기도한데로 하나님을 다를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위한 축복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우리가 상상할수 있는것보다 훨씬 더 크기때문이다.
제 3부 하나님 : 보이지않는 그분을 찾아서
9.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찾을수 있는 정도만 허락하신다.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도록 충분히 알려주시는 법이 없다.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행동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 할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행동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고귀하게 여기신다. -Ron Hansen-
10.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간실존의 모든 법칙은 인간이 무한히 위대하신 존재앞에 엎드릴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오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창조적인 예술가. 도로시세이저(Dorothy Sayer)의 창조주의 마음(The mine of the maker). 작품은 작품이 끝났다고 해서 창조행위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책의 창조행위는 사람들이 그 책을 읽을때 완성된다. 예술가는 자기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한가지 목적을 위해 창조행위를 한다. 그 작품을 누군가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것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 이 마지막단계가 바로 "인식"의 단계이다. 인식은 창조의 마지막단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마치 사랑할 사람이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능력이 강조되면 사람은 감소된다. 사랑이 강조되면 능력이 감소된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강한능력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에 가린 부분은 더욱 어두워진다. 하나님의 그림자는 너무 커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장을 막았다.
11. 로제타스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셨다. 로제타스톤의 발견처럼 예수님의 발견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알게해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다른사람을 아는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분을 안다. 우리는 예수님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더 잘알게 되었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고"(히 5:8-9)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유
왜 강이 범람하는지, 왜 지진이 일어나는지, 왜 질병으로 죽어가는지, 왜 어떤 아이들은 백혈병으로 죽어가는지... 나는 왜 이런일들이 일어나는지 예수님께 배울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느끼시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배울수 있다. 나사로의 죽음, 아들을 잃은 과부, 문둥병자 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얼굴을 드셨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다.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제대로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믿음의 로제타스톤이신 예수님을 꿋꿋이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성경은 고통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대답없이 남겨두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특정한 고통의 제공자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왜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기전에 예수님께서도 나와 똑같은 좌절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것을 알고 계시는데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 라는 질문. 예수님께서도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을때 밤을 지새며 절박하게 기도 하셨다. 마땅히 나도 그래야한다. "그럴듯한 교뢰를 엄청나게 많이 알고 망해가는 것보다 작은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터득하는 것이 훨씬 낫다" 소중하게 터득된 믿음의 핵심은 믿음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기초로한다. -Henry Drummond-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모습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사이의 거대한 간격을 이 세상은 극복할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 최상의 표현인 예수님은 그분이 이땅에 계셨던 시대에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나 비슷한 거부 반응에 부딪히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다가와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드러내셨다. 인간이 순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을 정복하실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선 곳과 반대방향으로 하나님께서 가셨던 여정을 시작한다. 그것은 십자가다. -Simone Weil-
12. 중재자: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간과하는 곳이나 가장 평범한 일 속에 심어주신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교회에 넘겨주셨을때 그분은 사역의 책임까지 모두 넘겨주셨다.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