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필립얀시)
하나님께서는
왜 이해할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시는지
어떤때는 왜 아무일도
않하시는 것 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이책은
신학서적이다. 그러나
결코 학문적인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에대한
책이며 왜 하나님은
가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시고 대로는 전혀
일하시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는 책이다.
신학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다.
그늘속의 하나님
어두운
바깥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별을 보기 원한다면
어두움이 필요합니다.
비록 별은 어두움을
필요로 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지만....
에니 딜라드
아무도 묻지않는
세가지 질문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무신론자일
것이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는게 없다.
첫번째
질문 :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상과 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순종하면 상을
그렇지 않으면 벌을.
그러나 여호수아와
사사기에는 그 공평한
하나님의 상벌 체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때 이스라엘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두번째질문
: 구약에 또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때가 있다. 아말렉
족속과는 싸우지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패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가서 싸우고 패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불순종하기는
마찬가지. 정확한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믿음성장에 방해가
될수도 있다.
세번째질문
: 출애굽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모든 증거를 보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도 계속적인
믿음의 진보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
다시말해 기적은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보다 기적 그
자체에 우리 자신을
중독시킨다.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보면 그 안에 실재하시는
한 인격자를 만난다.
예수님. 그분은
감정을 가지고 계시고
기쁨과 분노도
느끼신다.
성경에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로 한 사실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라는 문제는
결국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사랑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문제였다. 하나님데
대한 감정적인 실망의
문제는 모두 관계의
문제로 귀착된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은 왜 내게 불공평하시고
하나님은 왜 내게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내게 숨어계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관점이지
우리는 한번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분석받기 원하시기보단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내초의모험,
인간의자유
창작을하는사람들은그행위가
결국은 자신을제한하는
활동임을 알게된다.
예전에 없던 어떤것을
만든다고 하면 그 석은 다른
선택을 포기하는 일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의단계 마다 하나님은
어떤것을 선택하셨고 그때마다
다른 선택의길을포기하셨다.
인간만이
피조물중에서 유일하게
그 창조주를 거역할수있었다.
조각품이 조각가에게
뺨을 때릴 수 있었다.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가
자기 마음대로 대사를바꿀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유로왔다.
즉 인간은하나님의모험.
아마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함께
공존하는 문제를 이해하지못
할 것이다.
그러나 매순간 신적포기(divine
abdication)가 발생하고 있는것
같다. -C.S. 루이스-
하나님의 실망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주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장 5~7절)
이때
유일하게 노아가
하나님이 의롭게 여긴
사람이었고 물로 모든
생명을 멸하신 후
다시는 내가 물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리라
약속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제한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저의 선이었다.
스스로를 제한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중에서
가장 큰 가치를 두는건
바로 믿음. 인간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구약성경에
숨겨진 주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외로움이라
할 수있다. 외로우신
하나님.
직사광선을 계속 바로
볼수 없듯이....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
발견할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한계이다. 하나님의
권능도 사랑만큼은
맘데로 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게
만드셨다. 그러나
애굽에서의 극적인
기적도 현재 우리가
바라는 그런 기적도
결코 사랑하는 마음을
조정할 수없다.
하나님의
문제는 그분이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문제는 그분이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 듯이 하나님의 삶
또한 복잡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고 계셨다.
그들이 어찌 행할
바를 내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전부터 알았노라.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예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그날에
정녕코 나의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기적을 베푸셔도
거기에는 또 다른 불이익이
있다. 백성들
개인의 자유가 제한됐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가는 규율을
만들었고 거기에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그 당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이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의성막에 나아오는자는
누구든 죽으리라"
뉴턴은 거울을
통해서 태양을
바라보려하다가 눈을
실명할뻐한 적이 있다.
우리의 눈은
직사광선을 쳐다볼수
없다. 우리는
빛되신 하나님을 직적
쳐다볼수 없다. 애굽을
탈출한 수천명의
사람들 중에 겨우 2명만이
살아남았다. 즉
여호수아와 갈렙.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영영히 타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숨어계시는
것에 대해 우리가
실망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사야서
33장14절)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엘리사와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전형적인 선지자가
아니라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
뒤를 이은
선지자들중에는 이 두사람처럼
기적을 베풀었던
선지자들은 거의 없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이후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권능의 역사를 기적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백성들의
절규를 대신 외쳤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역사속에서 그 어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실망의
감정을 토로했다.
이사야 :
"진실로 주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이사야
45장 15절)
예레미아 :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예레미야
14장 9절)
하박국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하박국
1장 2절)
연인에게 상처받은
심정의 하나님
위와 같은
선지자들의 질문에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하나님은 말씀이
확증을 별로 주지못하는
증거라고 여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왜 숨어계시느냐는
선지자들의 외침에 동의하셨고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
앞에서 떠났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했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스가랴
7장 13절)
"내가 행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요 나의
긍휼로 인함이라"
하나님의 더디행함은
그분의 긍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유예기간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실망할 때
숨어계시다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그
숨어계심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함이다.
"나의 심판은 엄하지만
나는 지금 너와 고통을
함께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셨는지
모르지만 그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행복한 가정을
바라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런
부모의 심정에서
상처받은 연인의
심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예레미야
5장 7절)
성육신 가장 겸손한
자기 낮춤
비천한
여종을 사랑한 한 왕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
이 왕은
여종에게 어떻게 사랑하나는
고백을 할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여종을 궁으로 불러들인다면
그 종은 따라 들어올것이고
아마 왕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그녀도
사랑한다고 고백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종의
고백이 진실일까?
그 여종이 왕을
사랑하게 될까? 반대로
왕이 그 여종의
집에 방문하게 되면
많은 신하들이
따를테고 여종은
겁먹을테고 아마 왕을
사랑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왕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결정을
내리길 이
왕이 할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그
여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왕좌를 포기하고
그녀의 작은
오두막으로 향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6절)
사랑만이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자신을
낯추셨다. 그리고 가장 겸손한
자기 낮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더욱더
놀라운 일이다. 존 돈(John Donne)
서로다른 기대감
예수님의 일생은 우리가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이 3가지
질문에 어떤 해답을 주는가
첫째,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복음서가 말해주듯 예수님이
이땅에 살아계시는 동안
하나님은 분명 침묵을 깨셨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숨어계시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땅에 형상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당시는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가족 조차도....
셋째.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이질문은 예수님에 대해
가장 큰 의심을 품게 만든
질문이다. 예수님은 많은
치유의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고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한명의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
예수님의 사촌 세례요한
조차도 예수님을 세례하고
2년후에 메시아에 대한 실망의
위기를 가지고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었을 때 사람들을
보내어 물어보게 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우리가 불공평하다고
불평할 때 생각해야할 것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불공평한 사건으로
끝을 맺는다. 가장 훌륭했으면서도
가장 고통스런운 징벌을
받은 사람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체율하신다고
얘기하고 있다. 체율한다는
말은 영어로는 sympathy 라고 하는데
이 말은 sym 과
pathos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suffer with
즉 함께 고통을 당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묻고 있는 이
세가지 질문은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 찾아볼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조차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 불순종의 유혹에서
비로서 참 순종을 배울수
있었고 도망가고자하는
유혹에서 참 용기를 배우셨다.
이런 순종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가장 중요했던
임무를 완수하지못했을
것이다.
교회, 그리스도의
몸
예수님은
이땅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이땅에 교회를
세우시기위해 오셨다.
성경에는
3가지 성전이
등장한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과
헤롯왕이 완성한
거대한 건물이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몸인 성전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헐라 내가
그것을 사흘만에 다시
지으리라"
그리고 세 번째
성전은 지금의
우리모습.
하나님은
이일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완전한
하나님이 이제는 불완전한
인간안에 거하고
계신다.
인간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어거스틴은
말하길 "하나님
없이 우리는 아무일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사도바울이
믿는 성도들을 핍박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냐?"
만일
당신이 내게 하나님을
보여줄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대답하길..."예
당신이 보고 있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
대부분의
하나님에 대한 실망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다.
도로시세어즈는
말하길 하나님이
인간을 구언하시기
위하여 세 번의 커다란
수치를 겪으셨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수치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성육신사건.
두 번째 수치는
인간들의 손에 의해
공개처형을 당했던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사건.
세 번째 수치는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부인을 통해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보통사람들에게
위임하는 모험을 하신
것이다.
욥과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가 믿지않는가?
이것이 현대인을
양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욥기는
이세상의 삶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예다.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문,
인간은 나를 대적할것인가
아니면 순종할것인가?
하나님은
왜 이땅에 악을
허락하시고 고통이
존재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재창조의 역사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셨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이다.
인생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
-첫번째
반응은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것
-두번째
반응은 하나님도
이세상이 불공평하신걸
알지만 어쩔수 없다.
능력이 없다.
-세번째
반응은 미래에는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현실의 불공평을
회피한다.
-네번째
반응은 선한사람은
흥하게 되고 악한
사람은 망한다. 전면적인
공평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같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에 대한 사랑은 물직적인
환경을 초월한것이고
눈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가
무너진다해도 우리가
믿음을 지킬수있다면
우리는 인생이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은
불공평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시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통하여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을 이겼지만
불공평을 이기지는
못했다. 따라서
부활절이 필요했다.
부활절이 되기전
토요일 우리는 이
토요일을 살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은
우리가 아플 때도 건강해야
한다고 하는 명령과
같다. 즉
우리가 목말라 죽을
때도 노래를 부르고
다리가 부러져도
달려야 한다는 계명과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위대한 계명이다.
특별히 광야에서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라.
대답을 거절하신
하나님
욥과
같은 불공평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설명하지
않으신다. 단지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생각하게 하신다.
대답을
거절하시는 이유:
합리주의가 도움이
않되기 때문에 해답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있는 고통뒤에
숨겨진 진짜이유를
안다면 그 고통의
기간을 더 잘 참을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나님과
시간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점에 대한 두가지 예.
17만년전의
초행성 폭발. 작가의
책속에 흐르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우리는 시간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1987년 칠레의 한
천문학자가 육안으로
멀리 있는 초신성의
폭발을 관찰했다.
하지만 이 폭발은 17만년전에
발생해서 일년에 6조말일을
날아와서 우리
은하계에 도착했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폭발은 17만년전에
발생한것이겠지만
초신성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어떤
존재인가?
이처럼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고 있고 이를
초월한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는 이해할수도
상상할수도 없다.
한작가가
그 작품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라고
쓴다음에 2주동안
휴가를 갔다와서 다시
작품을 쓰려고 할 때 그
작가는 작품속에 있는
시간에 제약을 받게
된다. 그래서
전화벨이 울리자 2주
후에 전화를 받았다
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시차적으로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영화전체를
한번에 보신다.
예정,
예지라는말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욥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것인가를 미리
알고 계셨는가? 그렇다면
이 내기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세상의 단순한
시차원리를 하나님께
적용할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미리보고 계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행동을 영원한
현재속에서 그냥
바라보고 계신다.
마치 작가가
작품속의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듯이...
두종류의 믿음
첫째종류의
믿음은 시편23편의
믿음 :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우리는
가끔 "그냥
믿으세요"라고
얘기할때가 있다.
이때 말하는 믿음은
어떤 불가능한 사실을
받아들이기위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리킨다.
두번째
종류의 믿음은 시편
22편의 믿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믿음은 욥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같은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데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는 이
두가지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키에르케고르
: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 수학문제를
직접 풀기보다는 책
뒤의 모범답안을 보고
풀려고 하는 학생과
같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학생들 중에
하나이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
우리의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는가?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 나를위한
기도, 가족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
성경에는 응답되지
않은 대표적인 기도
두가지가 나온다.
예수님의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리고 사도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고쳐달라는 기도.
우리는
우리의 기도 응답에 대해서
너무 경솔하게 기뻐하지
말아야한다. 우리의
믿음이 더 강건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섬세하게 돌보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한가지 얻을수
있는 위로는 하나님은
자신이 통과하지
않으신 시험을
피조물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겪으셨기때문...
하나님은
욥에게 내기를 걸면서
그의 양손을 묶어
버렸다고 볼수 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다리셨던 밤 당신의
손이 묶이도록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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